사람의 경험을 사건으로 엮어 오래 보관하게 만드는 핵심 기관이 해마입니다. 측두엽 깊숙이 자리한 이 구조는 바다말을 닮은 모양 때문에 이름이 붙었고, 감각이 뇌 전역에서 올라온 단편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묶어 재저장하는 관문으로 작동합니다. 본 글은 해마의 구조와 회로, 기억 형성의 생물학적 메커니즘, 동물과 인간 연구에서 밝혀진 기능, 수면과 공고화의 관계, 스트레스와 노화, 질환과 재활 전략까지 연구 근거와 함께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H. M. 환자 사례(Scoville와 Milner, 1957) 같은 고전 연구부터 장소세포(O’Keefe와 Dostrovsky, 1971), 장기강화(Bliss와 Lømo, 1973), 런던 택시기사의 해마 변화(Maguire 등, 2000), 운동이 해마 용적을 늘리는 연구(Erickson 등, 2011), 수면 중 재생과 공고화(Wilson과 McNaughton, 1994; Rasch와 Born, 2013)까지 핵심 근거를 포함합니다.
해마의 구조와 연결, 기억으로 들어가는 관문
해마는 변연계에 속한 구조로 감정·동기·기억을 이어주는 네트워크의 핵심 관문입니다. 변연계는 크게 대상회와 해마주위겉질, 해마체, 편도체, 시상하부와 유두체, 앞시상핵 등으로 이루어지며 서로 연결되어 상황의 의미와 감정을 정리해 행동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이 가운데 해마체는 치아이랑(dentate gyrus), CA3, CA1, 아위피질(subiculum)로 묶인 구조이며, 해마로 드나드는 바깥 관문인 내후각피질(entorhinal cortex)과 함께 한 세트로 작동합니다. 정보 흐름은 내후각피질→치아이랑→CA3→CA1→아위피질→대뇌피질로 이어지는 ‘삼단 회로’가 뼈대가 되며, 치아이랑은 비슷한 장면을 헷갈리지 않게 구분하고, CA3는 불완전한 단서로도 전체를 복원하며, CA1·아위피질은 결과를 피질로 내보내 장기 저장을 돕습니다. 요약하면 해마는 각 피질에 흩어진 요소들을 하나의 ‘장면 인덱스’로 묶어주는 기억의 관문이자 중계 허브로, 이 경로가 막히면 새로운 일화 기억을 만들기 어려워집니다.
기억의 생물학: 장기강화와 해마 인덱싱 이론
기억의 신경학적 핵심은 시냅스 가소성입니다. 토끼 치아이랑에서 고빈도 자극 후 시냅스 효율이 오래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보여 준 장기강화(LTP)의 최초 보고는 Bliss와 Lømo가 1973년에 발표했습니다. 이후 CA3-CA1 경로, 해마-편도체 상호작용, 해마-전전두엽 축에서 LTP/LTD가 기억 흔적의 분자적 토대임이 반복 입증되었습니다. Teyler와 DiScenna가 제안한 해마 인덱싱 이론에 따르면 해마는 경험의 각 요소가 저장된 피질 영역들의 주소를 묶어 ‘색인’을 만들고, 초기에는 그 색인이 재생에 필수지만 시간이 지나면 피질 내 연결이 강해져 해마 의존성이 줄어듭니다. 이런 시간의존적 이전은 해마에 단기 흔적, 피질에 장기 흔적이 남는다는 이원 저장 모델과 맞닿아 있습니다. 분자 수준에서는 NMDA 수용체 의존성 칼슘 유입, CaMKII 활성화, AMPA 수용체 삽입, CREB 매개 전사 프로그램과 스파인 구조 변화가 초기 강화를 주도하고, 수면·반복 재생을 통해 단백질 합성과 시냅스 안정화가 장기 기억을 굳힙니다. Tonegawa 연구팀은 2012년 쥐에서 특정 학습 순간 활성화된 세포 집단을 광유전학으로 표지·조작해 ‘엔그램 세포’가 기억 접근을 매개한다는 것을 납득할 증거로 제시해, LTP·인덱싱·엔그램이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건과 공간, 시간의 지도: 장소세포·격자세포·시간세포
해마는 단순 저장고가 아니라 경험의 좌표계를 구축합니다. O’Keefe와 Dostrovsky는 1971년 쥐 해마에서 특정 위치에 있을 때만 격발하는 뉴런을 발견하고 이를 장소세포라고 명명했습니다. 뒤이어 내후각피질에서 일정 간격의 육각 격자처럼 공간을 타일링하는 격자세포가 2005년 Hafting 등에게서 보고되며, 입력의 추적과 통합이 해마 지도 생성에 기여함이 밝혀졌습니다. 시간 축도 예외가 아닙니다. MacDonald 등은 2011년 해마에서 과업의 흐름 동안 순차적으로 활성 패턴을 보이는 시간세포를 보고해, “어디서”뿐 아니라 “언제”의 정보가 해마 코드에 내장됨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간 연구에서도 Wilson과 McNaughton, Ekstrom, Hassabis 등의 fMRI·단일뉴런 기록은 장면 재연상이 해마 패턴의 재현과 동반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공간·시간 코드는 일화 기억의 본질인 ‘맥락’을 구성합니다. 예컨대 같은 목소리라도 강의실에서인지, 낯선 도시 골목에서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장면으로 인출되는 것은 장소·시간 코드와 정서 코드가 해마에서 엮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좌표화는 탐색 중의 세타 리듬(4–8 Hz)과 감마 리듬의 위상-진폭 결합 속에서 순서화되어, 단기 경험을 계단처럼 장면 서열로 정렬해 줍니다.
실험이 말해 준 것들: H. M., 수중 미로, 런던 택시기사
해마의 기능을 단번에 분명하게 만든 것은 H. M. 환자입니다. Scoville와 Milner는 1957년 측두엽 내측(해마 포함) 절제 후 H. M.이 중대한 순행성 기억상실을 보였으나 운동기술 학습 등은 상대적으로 보존됨을 보고해, 해마가 일화·서술 기억의 획득에 필수임을 입증했습니다. 동물 모델에서는 Morris가 1982년에 고안한 수중 미로 과제가 결정적이었습니다. 해마를 손상한 쥐는 숨겨진 발판의 위치를 공간 단서로 학습하는 데 실패했고, NMDA 차단으로도 유사한 결손이 유발되었습니다. 인간의 생태학적 근거는 Maguire 등이 2000년 제시했습니다. 런던 택시기사의 해마 후방 용적이 비전문가보다 크고, 근무 경력이 길수록 증가하는 경향이 관찰되었으며, 은퇴 후 감소하는 양상도 보고됐습니다. 이는 해마가 ‘공간—경험 지도’를 구축하며 생활 경험에 따라 가역적으로 변한다는 신경가소성을 시사합니다. Wilson과 McNaughton(1994)은 쥐가 미로를 달린 경로를 수면 중 해마에서 압축된 시간 척도로 재생하는 것을 보여주어, 깨어 있을 때의 장면이 꿈결에 다시 연주되며 장기 저장으로 옮겨짐을 시사했습니다. 이처럼 환자, 설치류, 인간 이미지 연구가 일관되게 가리키는 결론은 해마가 사건의 맥락적 뼈대를 만들고 재연결한다는 점입니다.
분리와 완성, 스트레스와 신경발생: 균형이 흔들릴 때
치아이랑의 패턴 분리는 서로 비슷한 장면을 헷갈리지 않게 하는 기능입니다. Yassa와 Stark는 2011년 노화가 치아이랑-CA3 회로의 과도한 일반화 경향을 낳아 유사한 이미지 판별에서 오류가 늘어난다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반대로 CA3의 재귀 회로는 일부 단서로 전체 장면을 복원하는 패턴 완성의 엔진입니다. 이 균형은 스트레스에 민감합니다. Lupien 등은 1998년 코르티솔 과다 노출이 해마 용적 감소와 기억 저하와 관련됨을 보고했고, 우울증·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서도 유사한 소견이 반복되었습니다. 성인 해마 신경발생은 Eriksson 등이 1998년 인간 해마에서 새로운 뉴런이 생성된다는 증거를 제시한 이래, Sorrells(2018)는 미미하거나 부재하다고 주장했고 Boldrini(2018)는 고령까지 보존된다는 반대 증거를 내놓으며 논쟁이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다만 설치류에서는 성인 신경발생이 패턴 분리 성능을 높이고 스트레스 조절과 연관된다는 데이터가 많습니다. 결국 해마 회로는 스트레스 호르몬, 염증, 수면, 신체활동 같은 전신 변인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그 균형이 깨질 때 오기억, 장면 혼동, 맥락-부적합 인출 같은 문제가 증가합니다.
수면, 리플, 그리고 공고화의 무대
기억은 자는 동안에 자랍니다. 해마는 서파수면에 접어들면 짧고 고주파인 샤프웨이브-리플(sharp-wave ripple) 이벤트를 자주 발생시키는데, 이는 깨어 있을 때의 장소세포 발화 서열을 압축해 재생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Wilson과 McNaughton(1994)은 수면 중 재생이 깨어 있을 때의 경로를 보존하는 것을 처음 보였고, Diba와 Buzsáki(2007)는 재생이 정방향뿐 아니라 역방향으로도 일어나 다음 날의 탐색 계획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Rasch와 Born은 2013년에 수면 공고화 이론을 정리하며, 해마가 임시 저장한 장면이 수면 중 전전두엽·두정 연합피질과 상호작용하여 장기 보관용으로 ‘이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후각·청각 단서 재노출 실험에서는 잠든 동안 학습과 연관된 단서를 조심스럽게 들려주면 다음 날 관련 과제 수행이 좋아지는 결과도 제시되었습니다. 반대로 수면 박탈은 해마 의존적 기억 형성을 방해합니다. Buzsáki는 세타-감마 결합과 리플을 하나의 연속 회상 메커니즘으로 보고, 탐색 중에는 세타 진동 위상에 맞춰 장면을 순서화하고, 수면 중에는 리플을 통해 서열을 압축 재생해 피질 네트워크에 각인한다고 정리했습니다. 수면 위생활습관은 곧 해마의 가소성에 직결된다는 뜻입니다.
질환, 노화, 그리고 회복을 위한 처방
알츠하이머병은 브라크 단계에서 보듯 내후각피질과 해마입구가 가장 먼저 병리 변화에 노출됩니다(Braak와 Braak, 1991). 초기 증상이 ‘어제 일이 흐릿하다’는 일화 기억 장애로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우울·불안·PTSD에서도 해마 용적 감소, 맥락 처리의 왜곡, 과잉 일반화가 흔히 관찰되며, 치료로 가역적 회복이 가능하다는 보고도 늘고 있습니다. 생활 개입의 증거로 Erickson 등은 2011년 1년간의 유산소 운동이 고령자의 해마 용적을 평균 2%가량 늘리고 기억 과제 성능을 개선한다고 보고했습니다. 명상·마음챙김 훈련은 스트레스 반응을 낮추고 기능적 연결을 개선한다는 fMRI 결과가 축적되고 있으며, 공간 탐색형 가상현실 훈련은 내비게이션과 장면 연상 능력 향상에 효과를 보이는 중재로 연구 중입니다. 더 직접적인 접근으로 Suthana 등은 2012년에 인간 내후각피질 심부자극이 공간 기억 수행을 향상할 수 있음을 제시해, 회로 수준의 보조적 개입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약물학적으로는 NMDA 조절, BDNF 경로 활성화, 항염 전략이 후보로 검토되고 있으나, 장기 안전성과 개인차에 대한 정밀한 검증이 요구됩니다. 결국 해마를 위한 최선의 처방은 규칙적 유산소 운동, 충분한 수면, 스트레스 관리, 새로운 장소와 기술을 배우는 적극적 탐색이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생활 습관의 꾸준한 누적입니다.
해마와 전전두엽의 대화, 맥락과 추론의 지능
마지막으로 해마는 전전두엽과의 대화를 통해 단순한 ‘기억 회수’를 넘어서 ‘맥락 기반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전전두엽은 목표·규칙·전략을 표상하고, 해마는 필요한 장면과 연계 지식을 빠르게 인덱싱해 제공합니다. Shohamy와 Wagner를 비롯한 연구는 해마가 개별 경험들 사이의 숨은 공통분모를 찾아 ‘관계 기억’을 구축하고, 전전두엽은 이를 의사결정에 활용하도록 조정한다는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해마의 패턴 분리/완성 능력은 유사하지만 다른 상황을 구분하고, 결핍 시 과잉 일반화로 위험·불안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과도한 패턴 완성은 단편 단서로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하고 오기억을 늘릴 수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이 대화의 질을 높이려면 사실의 기계 암기보다 경험을 연결하는 과제 설계가 중요합니다. 서로 다른 교과·상황의 사례를 엮어 학습자가 관계를 스스로 찾아내게 하면 해마-전전두엽 네트워크가 강화되어 전이 학습이 촉진됩니다. 기업·임상에서도 정책·치료 지침을 맥락 별 시나리오로 훈련시키면, 위기 시 빠른 추론과 정확한 인출이 가능해집니다. 해마를 단순 기록 장치가 아니라 지능의 구조화 인덱서로 이해할 때, 우리는 기억 교육·재활·업무 훈련을 더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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